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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베일러블러 : 모호한 경계, 탐구하는 몸
강원기 x 김다예 (잉어 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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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베일러블러>는 포킹룸 2021에서의 전시를 전후로 잉어(ing-er)가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있는 주제이다. ‘모호한 경계, 탐구하는 몸’은 <어베일러블러>에서 파생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협업하게 된 강원기(WK)와 잉어의 김다예(DY)가 작업의 흐름을 돌아보고 다음의 방향을 생각하며 나눈 대화를 기반으로 한다. 

 

어베일러블러


DY: <어베일러블러availabler>는 도시공간을 신체와 행위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프로젝트이다. 사용 가능한 상태를 뜻하는 형용사인 ‘available’에 도구를 뜻하는 접미사 ‘er’을 붙여 도시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를 지칭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만지고, 바꾸고, 사용할 수 있는 도시의 요소를 살펴보고자 했다. 작업실에서 작게 열었던 첫 전시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찾은 어베일러블러의 사진을 모아 전시했다. 2021년 포킹룸에서는 모아둔 사진을 데이터 삼아 이미지에 어베일러블러의 영역을 표시해주는 기계를 만들고, 기계의 불완전한 답에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관람객의 동작에 실시간으로 어베일러블러의 형상을 덧붙이는 영상을 전시했다. 시기별로 협업자에 따라 작업 방식이 변하기도 하고, 기계를 활용하면서 기술 자체에 관한 질문에 무게가 실리기도 했다. 방법은 달랐지만 모두 도시공간을 활용하는 적극적인 신체를 옹호하는 작업이었다. ‘어베일러블러’라는 개념이 함의하는 도시의 유기적인 모습을 그리고 이를 설득하고자 했다.

사진. availabler (2019)

사진. availabler (2021)

WK: <어베일러블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인체에 그를 둘러싼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주권을 돌려준다는 데에 있다. 2021년 전시에서는 설계자가 전혀 관여하지 않았거나 혹은 설계 의도와 무관하게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발생하는 가구에 주목하고, 어포던스affordance의 자연적 발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연히 발생하는 어포던스를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디자인(@hostiledesign)과는 대조적이다. 모든 사물은 인지 능력이 있는 개체에게 그 사물의 활용 방식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며, 환경은 이 활용 가능성이 범람하는 총체적 장field이 된다. 2022년 전시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설계자가 가진 권력, 혹은 그 디자인이 우리의 몸에 근접한 지점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에 관여된 모든 권력을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근대 디자인이 우리의 주변을 표준화된 신체에 재단된 공산품으로 가득채웠다면, 몸동작에 반응해 주변 환경이 실시간으로 생성되고 변형되는 경험은 디자인이 그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서 참여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나아가 기계학습 알고리즘이 뱉어내는 비정형의 사물들은 사람의 행위에서 역설계된reverse engineered 사물들, 즉 전통적인 구축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한 신체와 물질의 연속적인 인터페이스에서 발생하는 사물은 어떤 모습을 할 지 상상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기계의 역할이 흥미롭다. 어베일러블러를 생성하는 기계에는 김다예의 일부가 녹아들어가 있다. 도시 가구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데이터셋에 반영되었고, 따라서 이 어베일러블러 기계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데이터셋에서 포착된 경계석에 쪼그려 앉아 있던 사람이 공간을 활용하는 습관과 욕망이 녹아들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설계자는 누구인가? 데이터 수집자 혹은 그 데이터셋 내에 포함된 사용자? 혹은 기계 그 자체? <어베일러블러>는 설계 자동화 프로젝트가 아니다. 이는 설계자-사용자 소통의 구조에 관한 것이며, 디자인 과정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불균형에 관한 것이다.

사진. availabler (2022)

사진. availabler (2022)-2 (ⓒPhotographer 이현석 @backstepforward)

모호함을 수용하기


DY: 도시를 만드는 과정에는 논리로 설명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설계 의도를 형태로 번역할 때의 논리적 비약과 사용자가 그 형태를 마음대로 활용하는 흐름은 기계학습에서의 ‘입력층 - 은닉층 - 출력층input layer - hidden layer - output layer’의 과정에 내재해 있는 은닉층의 불투명성과도 유사하게 느껴진다. 설계 과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입력과 출력이 그럴싸한 인과관계를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도시의 실제 모습을 살펴보면 설계 논리와 형태, 형태와 사용 방식은 온전히 대응하지 않는다. <어베일러블러>는 설계에서 논리, 형태, 경험의 느슨한 연결을 결함이 아닌 가능성으로 보고자 했다. 가장 최근의 전시에서는 관람객의 행위로 형태를 만들어 논리에서 형태로 이어지는 설계과정을 재구성했고, 포킹룸의 전시에서는 사용자의 경험이 담긴 사진을 기반으로 형태를 해석해봄으로써 형태에서 경험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뒤집었다. 


WK: 마치 인간이 겉으로 보기에 ‘비이성적인’ 혹은 ‘비논리적인' 결정을 하는 것처럼, 기계가 내리는 결정 또한 일정 수준 이상으로 복잡해지는 순간 그 결정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수만 개의 회로가 얽혀 그 내부의 인과관계를 추출해 내기까지는 수많은 ‘취조' 과정이 필요하며, 이를 또 다른 형태의 표현representation으로 번역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대표적인 예로 인간이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차원의 데이터를 2차원 혹은 3차원으로 추상화하는 군집화clustering 방식이 있다. 유사한 특징feature을 가지는 데이터 포인트는 가까이, 유사하지 않은 데이터 포인트는 멀리 배치하는 최적화 과정을 통해 하나의 ‘지도'를 그린다. 예를 들어, 그림 1에서는 사람의 비언어적 음성이 표현하는 감정을 이차원 평면에 표현하고 있는데, 발성을 한 사람이 표현하고자 했던 감정, 소리로 표현된 현상적 결과물, 그리고 청자에게 인지되는 감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분석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뿐더러, 큰 의미를 가지기도 힘들다. 이 인터페이스에서 눈여겨 볼 점은 서로 다른 감정들 간의 사이 공간이다. 혼란confusion과 흥미interest가 서로 가까이 위치해 있는데, 그 둘 간의 경계지역을 집중적으로 봄으로써 어떤 소리가 혼란과 흥미를 가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음성을 주파수, 음색, 진폭 등의 수치로 쪼개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접근이다. 사용자가 이 표현과 직접 상호작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용자는 기계의 두뇌 회로에 직접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림 1. Alan Cowen, Hillary Elfenbein, Petri Laukka, and Dacher Keltner. Mapping 24 Emotions Conveyed by Brief Human Vocalization. American Psychologist,

December 20, 2018.  

https://s3-us-west-1.amazonaws.com/vocs/map.html 

빅 데이터에 의존한 학습을 통해 새로운 데이터의 분류 작업을 목적으로 하는 지도학습supervised learning과 달리, 비지도학습unsupervised learning 혹은 표현학습representation learning은 어떤 대상에 내재해 있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개념구조를 발견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건축물을 포함한 표준화된 부품으로부터 조립되는 공산품은 우리가 공간을 인지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우리에게는 ‘의자’의 개념을 떠올릴 때 하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다리와 몸과 닿는 팔걸이, 등받침 등의 불연속적인 요소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기계학습은 이 부품들 사이의 경계를 흐리고, 사물을 다르게 보는 방법을 발굴해낼 수 있다. (그림 2)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을 가장 본질적으로 접근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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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의자를 의자로 만들까?’
그림 2. Ajay Jain, Ben Mildenhall, Jonathan T. Barron, Pieter Abbeel, Ben Poole. Zero-Shot Text-Guided Object Generation with Dream Fields. arXiv, 2021.

모호함은 가능성을 암시한다. 양자물리학에서 정의하는 불확정성의 개념은 물질이 어떤 점에 존재한다는 것은 단지 그곳에 위치할 확률이 가장 크다는 것을 의미할 뿐 동시에 다른 점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을 제시한다. 디자인 과정에서 하나의 디자인이 단단한 물질로 ‘굳어’지기 전의 단계는 ‘있을법'한 대안들의 확률만이 존재하는 흐릿한 양자구름과 같은 상태이다. 기계학습에서는 이 상태를 잠재공간latent space이라고도 일컫는다. 잠재공간의 모호함은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며, 참여를 유도한다. 흐릿하고 부드러운 경계들은 사용자의 참여에 따라 그 경계가 쉽게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복합성, 사이 공간, 회색 영역은 사물의 어포던스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탐구하는 몸’을 만든다. 

 

                        


개인을 넘어


<어베일러블러>는 개인의 신체에 주목한다. 그러나 가구로 대표되는 ‘몸이 닿는’ 사물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환경에서 신체가 닿을 수 있는 영역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신체를 확장적으로 생각했을 때, 몸의 경계를 시시각각 넘나드는 보이지 않는 물질들을 생각했을 때, 내가 아닌 몸들을 집합적으로 생각했을 때의 어베일러블러는 어떤 모습을 할 수 있을까? 


어베일러블러는 도시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이다. 도구는 개인이 도시를 경험하는 손쉬운 단위가 된다. 개인은 도구를 통해 도시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인지하거나 실험하고, 이를 함께 사는 도시에 투영한다. 한편, 마지막 전시에서 관람객들이 우산, 가방 등의 사물을 활용하거나 여럿이 함께 움직였을 때의 차이를 탐구하기 시작한 지점이 흥미로웠다. 신체의 형상이 디자인의 주체가 되면서, 개인으로 시작한 주체의 인식 단위가 다른 사물, 다른 신체로 확장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큼이나 쉬워진다. 자율성을 얻은 신체가 개인의 범위를 넘어 확장한다면 복합체로서의 도시를 경험적으로 이해하고 새로이 상상해보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향후의 프로젝트에서는 이와 같이 도구를 활용하는 주체의 확장과 협력을 더욱 적극적으로 다루어보면 좋겠다


강원기
건축과 컴퓨터공학을 공부했다. 신체와 공간, 언어, 컴퓨테이션 이론 등을 주제로 건축 및 디자인 분야 전반을 재해석하고 재발명하고자 한다. k--kang.com


김다예 
도시를 즐겁게 활용하는 설계를 고민하며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잉어(ing-er)를 만들었다. 일상의 공공 공간과 수평적이고 적극적인 협업 방식에 관심이 있다. 전시와 공간 디자인으로 도심 속 공간을 바꾸는 동시에 연구와 출판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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