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티쿼티, 플라스틱계
이소요
“플라스티쿼티, 플라스틱계”의 글과 사진은 이소요의 2022년 혼합매체 설치 〈플라스티쿼티〉 중 비디오 요소의 자막과 스틸컷입니다. 이 작품은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인류세의 인간유래 쓰레기(가제)"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플라스티쿼티(plastiquity)”는 가소성 있는 고분자합성수지를 뜻하는 ‘플라스틱(plastic)’과 유물을 뜻하는 ‘앤티쿼티(antiquity)’를 연결한 작가의 조어입니다.
플라스티쿼티, 플라스틱계
2022년 5월 어느 날 오후,
우리는 경기남부의 한 산업단지 조성 현장에 인접한 언덕에 올랐다.
나무와 풀이 자라고, 새소리가 들리고,
봄 햇살이 스며드는 아담한 숲이 있었다.
개발과 더불어 고속화도로가 지나가게 될 이 장소에서
30년 전 사용 종료된 쓰레기매립지가 발견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국토정보플랫폼에서 이 위치의 과거 항공사진을 조회하면
한국전쟁 이후 반 세기 동안 토양이 드러난 얕은 골짜기가 있었고
21세기에 접어들며 점차 식생으로 덮여간다.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2만 여 제곱미터 인적 드문 임야에
1987년 7월부터 1992년 1월 사이 약 4년 7개월 동안
지역에서 발생한 생활폐기물 약 26만 톤이 매립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부지는 전국에 걸쳐 수없이 많고, 그 규모와 상태가 다양하다.
1990년대 이전 건설한 우리나라의 쓰레기매립지는 침출수와
가스 처리 시설이 없는 곳이 많았고,
분리수거 시행 이전 여러 종류의 물질을 섞어서 모았다고 한다.
전국에 산재된 이 같은 장소들은 환경오염의 원인이 되기도 하여
정비와 안정화 사업으로 관리한다.
환경부는 2002년 전국의 사용종료 매립지 현황을 조사하여
1170 곳을 목록화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찾아간 이 언덕도 목록에 실려 있다.
전체 매립지 중 정밀조사가 필요한 사후관리대상 244 곳에 속한다.
관할 지방자치단체에서 2003년 이곳에 대해 작성한
정밀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방수시트, 배수로, 차수벽, 가스포집공,
침출수 집수정이 설치되어 있고,
매립지 상단에 묘목이 심겨 있다고 하였다.
2022년 5월 어느 날 우리가 본 이곳은 조림한 벚나무,
아까시나무가 자리잡은 가운데,
오갈피나무, 모감주나무, 무궁화, 찔레나무, 복숭아나무,
귀룽나무, 갈참나무, 쥐똥나무, 은행나무,
뽕나무, 회양목을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들어오며
천이하는 숲이 되어가고 있었다.
긴병꽃풀, 뱀딸기, 도깨비사초, 바랭이, 꼭두서니, 담쟁이덩굴,
닭의장풀, 개밀, 미국자리공, 애기똥풀, 지칭개, 환삼덩굴, 쇠별꽃,
주름조개풀, 쑥, 흰명아주, 단풍돼지풀, 미국쑥부쟁이 등.
나무 아래는 중부지역 들과 밭에 흔히 사는 번식력 강한 풀과
덩굴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 녹지를 보면서 누군가는 잡초 발생지가 되었으니
제초가 필요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2007년 지자체는 이 매립지에 대하여 안정화 정도와
환경 영향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최종 매립 후 15년이 지난 시점이다.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유기물 대부분이 분해되어
물질 표본의 90퍼센트 이상이 흙과 모래로 파악되었다고 한다.
난분해성 물질인 플라스틱이 소량 검출되었고,
침출수와 메탄가스 농도는 안정화 기준을 만족하며,
지반 침하의 증후가 없으므로 사후관리는 종료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지금,
30년 동안 땅 속에 가려져 있던 매립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생겼다.
KAIST 인류세연구센터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소속의 연구자들이다.
이들은 인간이 지표면에 쌓고 묻은 쓰레기가
인간유래의 새로운 지질시대, 즉 ‘인류세Anthropocene’를
특징짓는 퇴적 기작이자 층서학적 지표로
해석될 수 있는지 질문하는 과정에서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조사를 함께 경험하며 질문하고, 상상하고,
시각화하는 역할로 예술가들이 합류했다.
우선,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지반조사 전문기업
(주)지에스티에이와 함께
지반조사에 사용하는 대표적인 기법 중 하나인
코어 보링core boring 방법으로
매립지 두 지점에서 물질 시료를 얻었다.
코어 보링은 지하 광물의 조성과 상태, 분포 등을
조사하기 위해 땅에 구멍을 뚫고
‘암심’이라 부르는 기둥 모양의 암석이나 토양을 채취하는 방법으로
토목과 건축 분야에서 지반 적합성을 증명할 때 자주 사용하며,
지질학, 고고학 연구에도 활용한다.
회전하는 금속 드릴파이프로 땅을 뚫으면서 내려가면
파이프 내부가 시료로 채워지게 된다.
이 때 지층의 압력을 조절하고, 파이프의 윤활과 냉각을 돕고,
갈려나가는 토양과 암편을 씻어내고,
파이프에 달려 나오는 지질 시료를 밀어내는 등
몇 가지 이유에서 물을 주입한다.
이번 조사에서 얻은 물질시료는 지름 50 밀리미터
길이 1미터 규격의 파이프로 추출했다.
상단부의 복토층에서 시작하여 매립된 쓰레기를 거쳐
이 지역의 지반을 이루는
편마암층과의 경계까지 약 17에서 18미터 길이의
물적 정보 두 세트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시료는 매립 쓰레기라는 인간유래 물질을 지층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 검토하기 위한 근거 자료로,
그리고 미생물과 미세플라스틱 등
매립물의 성분 분석을 위한 재료로,
여러 과학자들이 현장에서 관찰하고 샘플링 하였으며,
2022년 9월 현재 연구 중이다.
남은 물질은 예술가들이 수거하여 촬영과 보존처리를 거친 후
하나의 시각적 아카이브로 가공하였다.
아카이빙을 위해 시료를 해체하면서,
여러 종류의 물성을 경험할 수 있었다.
기반암 조각들, 그리고 복토에 사용한 진흙과
모래 같은 돌과 흙이 주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합성수지와 섬유, 금속, 유리와 사기, 가죽과 고무,
연탄재, 나무, 종이, 유기물을 볼 수 있었다.
이 시료는 땅 속 물질의 형태와 성질, 위치 정보를 보존하며
출토하는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아닌
코어 보링으로 얻어냈기 때문에
기법에 특정하여 변형된 상태였다.
회전하는 드릴파이프로 압력을 가하며 파 내려간 사물들은
꼬이고, 찢기고, 깨지고, 압축되고,
뒤섞이고, 흩어졌다. 주입한 물로 인해
종이, 섬유, 나무 등이 젖고, 녹고, 뭉치기도 했으며,
공기와 만나며 생분해가 시작되어
금세 사물로서의 성질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코어 보링은 균질하지 않은 혼합 물질에 적용했을 때,
그 원형을 얻어낼 수 있는 기법은 아니었다.
덩어리진 물질들을 해체했을 때 가장 쉽게 골라낼 수 있는 것은
습기에 강한 합성수지였다.
유기물과 종이는 물, 토양과 섞이면서
낱개로 분류하기 어렵도록 변질되었다.
비록 표본으로서의 대표성이 충분하지 않고
물성이 유의하게 보존된 상태가 아니었으나,
직접 헤쳐본 시료에는 분해되지 않은 종이, 나무젓가락,
톱밥, 식물성 섬유 같은 물질이 꽤 있었고,
유기물이 대부분 분해되어 토양화가 이루어졌다는
지자체 조사보고서 내용과 차이가 있었다.
1973년부터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의
“투산 쓰레기 프로젝트Tucson Garbage Project”를
이끌어오고 있는 고고학자 윌리엄 뢋지William Rathje는
전국 도시의 쓰레기매립지에서 대규모 발굴 조사를 여러 차례 실시했다.
뢋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매립지 내용물과
실제 버려지고 발견되는 물질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Routt, David. Talkin’ Trash & Recycling. 1994. Paint it Black TV Productions.
보통 음식물 찌꺼기나 식물성 쓰레기를 묻으면
썩어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매립 후 15년 간 절반 정도 분해되고,
안정화가 이루어지면 더는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기물도 난분해성의 금속, 플라스틱처럼
지하에 장기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식물 포장재, 스티로폼, 오염된 기저귀 등
흔히 떠올리며 혐오하는 물질,
즉 합성수지보다 매립지 공간을 실제로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이 종이이며,
기대만큼 빠르게 또 효율적으로 생분해나 재활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뢋지의 주장이다.
이 같은 결론을 우리가 얻은 시료에 그대로 대입하기는 어려우나,
일정부분 참고할 수 있다.
30년 동안 땅에 묻혀 있던 인간유래 물질의 구성은 다양했고,
플라스틱만 남아 있지 않았다.
땅에 묻는다는 행위는 보존을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랜드필landfill. 인간유래 물질과 흙을 규칙적으로 쌓고,
덮어서 땅을 채우는 쓰레기매립지.
동식물의 잔해가 수천만 년을 견디며
화석이 되고 암석이 되어 석탄기의 지표로 여겨지는 것처럼,
수십 억년 전 광합성하는 미생물의 진화로
지구가 호기성 생물이 번성하는 파란색 행성이 된 것처럼,
쓰레기매립지도 언젠가 인간이라는 생물의 활동을
입증하는 하나의 물적 증거로 보존될 것인가?
혹은 인간유래 물질의 순환 기제가 진화함에 따라
공기와 물과 흙 속으로 흩어지게 될 것인가?
MPO Productions. Man in the Doorway. 1957. Prelinger Archives. 20'14''–22'15''.
No matter how big a tree grows, only a small percentage of it
can be used as boards and timbers.
나무가 아무리 크게 자라도 목재로 쓸 수 있는 부분은 적습니다.
A chemist takes what’s left and converts it to practical use.
화학은 남은 것을 가져다 실용성 있게 바꿉니다.
This tough and durable wood is chipboard,
made from woodchips and plastic.
이 단단하고 내구성 있는 목재는
나뭇조각과 플라스틱으로 만든 칩보드 입니다.
With veneer, and plastic treated paper,
it can be made into handsome furniture wood
that’ll take more abuse than the real wood.
이것을 무늬목, 플라스틱 가공한 종이와 접합하면
진짜 나무보다 튼튼한 훌륭한 가구용 목재가 됩니다.
Chemistry is isolating vanillin from
what used to be wasted byproducts of wood.
화학은 과거에 버려지던 목재 부산물에서 바닐린을 분리해냅니다.
You may taste it in your next dish of vanilla ice cream.
다음 번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죠.
This is tall oil obtained from wood waste.
이것은 나무 쓰레기에서 얻은 톨유입니다.
From this oil comes rosin for sizing paper and other chemicals widely
used in making drying oils for surface coatings.
이 기름에서 종이 접착용 로진과 표면코팅용
건조유로 널리 쓰이는 여러 화학물질을 얻습니다.
Another once wasted byproduct of wood is
now used in the production of
turpentine and camphor.
버려지던 목재 부산물 중에는 테레핀과
장뇌 생산에 사용하는 것도 있습니다.
This is sugar for animal feeds obtained
from wood by chemical process.
이것은 동물 사료에 사용하는 설탕으로 목재를 화학처리하여 얻어냅니다.
Adhesives of incredible strength making possible an enormous
national production of plywood.
초강력 접착제 덕분에 전국 규모의 엄청난 합판 생산도 가능합니다.
Well these are all examples of what we mean
when we say “chemistry is at work in conservation.”
이 모든 것은 소위 “화학은 보존을 실천한다”는
표현을 입증하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Chipboard, what is it? Ingenuity plus plastics.
칩보드가 무엇이겠습니까? 기발함과 플라스틱의 만남입니다.
The very word plastics takes us right into the heart of conservation,
because plastics improve on the products of nature,
and thus takes the pressure off our natural resources.
플라스틱이라는 단어는 곧 보존의 핵심입니다.
플라스틱은 자연의 산물을 개선하여
천연자원의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이죠.
Chemists pursued hundreds of lab experiments with cyanamide.
화학자들은 시안아미드로 수백 가지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Several years ago, they found one of its derivatives,
melamine, reacted with
formaldehyde to form a plastic.
몇 년 전, 그들은 그 화합체 중 하나인 멜라민이
포름알데히드와 결합하여
플라스틱이 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When this conquest of man over molecules was demonstrated,
a vast new industry was born.
The plastics moved into every waking hour of man’s life.
인간이 이 분자들을 정복하자, 거대한 신산업이 태어났습니다.
플라스틱은 인간 삶의 모든 곳으로 침투하였습니다.
가소성을 지니는 유물.
그것을 플라스티쿼티plastiquity라고 불러보았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흔히 ‘플라스틱’이라 일컬으며
필요악으로 여기는 물질,
화석연료 생산의 부산물을 원료로 하는
고분자 합성수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계몽시대에 구축된 자연의 체계, 동물계 ˑ 식물계 ˑ 광물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제 4의 ‘계kingdom’로
인간유래 화합물인 ‘플라스틱계’를 말하던
1950년대의 플라스틱은 전후 서방세계에서
희망과 혁신, 더 나은 삶을 상징하였고,
자연물을 보존하고, 재활용하고, 대체하고 보완하는
인간유래 화학물질anthropogenic chemical의 일종으로 각광받았다.
이 물질이 값싸고, 하찮고, 해롭고,
지저분하다는 심상을 얻게 된 것은 대량생산과 대중화 이후였다.
이소요, 〈플라스틱계〉, 2022, 싱글채널 비디오와 플라스틱 사물이 있는 설치.
그 물성이 삶을 압도하게 된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분류학적 비유인 ‘인류세’를 통하여
인공물과 자연물의 구분을 허물고
대사와 순환의 과정 속 수많은 물질 사이에서
보존conservation의 목적을 환기한다.
보고, 만지고, 냄새 맡으며 우리가 경험한 매립지의 쓰레기 표본은
풍요와 낭비의 잔재도, 이기적 자연착취의 상징도,
삶을 제압하는 거대한 재난 더미도 아니었다.
우리가 판단하는 플라스틱의 가치는
인간의 경제사회적 삶을 스쳐가면서
그 물성 만큼이나 순식간에 와해되고 갱신을 거듭하고 있으며
머지 않은 미래에 그 가소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공들여 붙들고 보존하는 유물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글 이소요
이소요는 생물을 시각정보와 예술창작물로 환원해온 문화적 관습을 탐구하는 미술작가이다. 미국 렌슬리어공대 예술학과에서 예술-과학사 학제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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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수현, 김양우, 이소요.
제작지원: KAIST 인류세연구센터, 예술의 전당, 한국전력공사
협력: KAIST 인류세연구센터,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도와 주신 분들: 경기도미술관 이혜현, 김석현, 을지예술센터 박지인, 전곡선사박물관 김소영, 포킹룸
참고자료:
국토지리정보원. 항공사진이미지 # 199500000400080022. 1995년 09월 17일 촬영.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평택시 사용종료 매립지 정밀조사 용역보고서』. 평택: 평택시청, 2003.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평택시 도일동 비위생매립지 주변환경영향 종합보고서』. 평택: 평택시, 2007.
환경부. 『사용종료매립지 관리대상별 현황』. 2002.
Bauer, Andrew M. & Bhan, Mona. Climate Without Nature—A Critical Anthropology of the Anthropocen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
Chalmin, Philippe. “The history of plastics: from the Capitol to the Tarpeian Rock.” The Journal of Field Actions, special issue 18 (March 2019):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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